맨위로가기

타니가와 코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타니가와 코지는 일본의 쇼기 기사로, 1962년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6년 14세의 나이로 프로 기사가 되었으며, 이는 가토 히후미에 이어 중학교 재학 중 프로가 된 두 번째 사례였다. 타니가와는 역대 최연소 명인으로 명인, 용왕, 왕위 등 주요 타이틀을 획득하며 4관왕을 달성했고, 영세 명인 자격을 얻었다. 2011년에는 일본 장기 연맹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논란 끝에 사임했다. 그는 '광속의 마무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쇼기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쇼기 기사 - 하부 요시하루
    하부 요시하루는 14세에 프로 쇼기 기사가 되어 최초로 쇼기 7관왕을 달성하고 80회 이상의 타이틀 획득, 7개 주요 타이틀 영세 자격 획득 등의 업적을 이루며 일본 쇼기계의 전설이 되었으며, 체스 국제 마스터 타이틀 획득 및 일본장기협회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 쇼기 기사 - 와타나베 아키라
    와타나베 아키라는 2004년 용왕전 우승을 시작으로 용왕, 기왕, 명인 등 주요 기전에서 우승하며 쇼기계의 주요 인물로, 용왕전 통산 11회 우승 및 9연패로 영세 용왕, 기왕전 10회 우승으로 영세 기왕 자격을 획득한 일본의 쇼기 기사이다.
  • 고베시 출신 - 가네모토 고지
    가네모토 고지는 1990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데뷔하여 3대 타이거 마스크로 활동했고, IWGP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등을 지냈으며 '주니어 싸움짱'이라는 별명을 얻은 프로레슬러로 현재는 프리랜서 및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 고베시 출신 - 가가와 도요히코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자 사회운동가, 소설가로서, 빈민 구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협동조합 운동 등 사회 개혁에 헌신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전시에는 제국주의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여 비판을 받았고, 전후에는 정치 활동과 세계 평화 운동에 힘썼다.
  • 효고현 출신 - 고이케 유리코
    고이케 유리코는 카이로 대학교 졸업 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하여 환경대신, 방위대신 등을 역임하고 현재 도쿄도지사로 재임 중인 일본의 정치인으로, 도민제일회를 창당하고 희망의 당을 이끌기도 했으며 경제 자유주의와 우익 포퓰리즘 성향으로 논란을 겪기도 했다.
  • 효고현 출신 - 후지토 치카
    일본 효고현 출신인 후지토 치카는 《디지몬 어드벤처 02》를 보고 성우의 꿈을 키워 《케이온!》의 마나베 노도카 역으로 데뷔, 에이벡스 플래닝 & 개발, 슈퍼 샤크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활동 후 현재 프리랜서 성우로 활동 중이며 2018년 결혼하여 2021년에 출산하였다.
타니가와 코지
기본 정보
쇼기 기사 타니가와 코지 (헤이세이 29년 11월, 히메지시에서 열린 인간 쇼기에서)
쇼기 기사 타니가와 코지 (헤이세이 29년 11월, 히메지시에서 열린 인간 쇼기에서)
이름타니가와 코지
원어 이름谷川 浩司
로마자 표기Tanigawa Kōji
출생일1962년 4월 6일
출생지효고현 고베시 스마구
사망일알 수 없음
국적일본
소속간사이
기사 정보
기사 번호131
프로 입단1976년 12월 20일 (14세)
스승와카마츠 마사카즈 8단
제자토나리 류마
9단
순위전B급2조
용왕전4조
타이틀영세 메이진
영세 칭호17세 명인
타이틀 합계27기
우승 횟수22회
기타 정보
일본 쇼기 연맹131
웹사이트일본쇼기연맹 프로필 페이지

2. 프로 데뷔 이전

1962년 4월 6일 일본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다.[1]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3년 5급으로 일본 장기 연맹의 장려회에 입회하여 프로 기사를 목표로 삼았다.[1][35] 이후 순조롭게 승단하여 1975년 초단, 1976년 12월 20일에는 4단으로 승단하며 중학교 2학년의 나이로 프로 기사가 되었다.[2][3] 이는 가토 히후미 이후 사상 두 번째 '중학생 기사'였으며, 중학교 2학년 이전에 프로가 된 것은 타니가와가 처음이었다.[36]

주요 승단 기록 (프로 데뷔 이전)[8]
단계날짜
5급 (장려회 입회)1973년
초단1975년
4단 (프로 데뷔)1976년 12월 20일


2. 1. 어린 시절

타니가와 코지(谷川浩司)는 1962년 4월 6일 효고현 고베에서 태어났다.[1] 그가 5세 무렵, 5살 위 형 토시아키와의 싸움이 잦자 아버지가 이를 멈추게 할 목적으로 장기판과 장기 말을 사주어 형제가 장기를 두게 한 것이 장기와의 첫 만남이었다.[31][32] 규칙은 백과사전을 찾아 익혔고[33], 효고현 대회에 나가면서 장기에 재미를 붙였다. 다만 형제 싸움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전해진다.[31] 지는 것을 싫어했던 타니가와는 어릴 적 말을 던지거나 물어뜯기도 했다고 한다.[34]

초등학생 시절, 고베 산노미야에서 열린 장기 행사에서 나이토 구니오 (당시 8단)와 대국할 기회를 가졌다.[34] 나이토는 당시 타니가와에 대해 "중반에서 종반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뛰어났다"고 평가했으며[34], 타니가와 본인도 이 경험이 "큰 자신감이 되었다"고 회고했다.[34]

프로 기사를 목표로 삼은 타니가와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3년 4월, 5급으로 일본 장기 연맹의 장려회에 입회하여 와카마츠 마사카즈 문하에서 수학했다.[1][35] 이후 순조롭게 승급과 승단을 거듭하여[35], 중학교 2학년이던 1976년 12월 20일에 4단으로 승단하며 프로 기사가 되었다.[2][3] 이는 가토 히후미에 이어 사상 두 번째 '중학생 기사'의 탄생이었으며, 중학교 2학년 이전에 프로가 된 것은 타니가와가 처음이었다.[36]

주요 승단 기록 (프로 데뷔까지)
날짜내용
1973년 4월5급으로 장려회 입회
1975년초단 승단
1976년 12월 20일4단 승단 (프로 데뷔)



참고로 타니가와의 형 토시아키는 나다 중학교・고등학교,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아마추어 강호인 리코 장기부에서 활동하며 여러 아마추어 타이틀을 획득했다.[37] 4단 시절의 하부 요시하루[39]나 사토 야스미츠[38]를 평수 대국에서 이긴 경험도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네슬레 일본 고베 본사에서 근무 중이다.[38]

또한 타니가와는 1972년 5월 5일, NHK 교육 텔레비전의 장기계 첫 컬러 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여류 아마추어 준명인 카네다 무츠미와 대국하기도 했다.[79]

2. 2. 프로 기사의 꿈

타니가와 코지(谷川浩司|타니가와 코지일본어)는 1962년 4월 6일 효고현 고베에서 태어났다.[1] 5세 무렵, 5살 위 형인 토시아키와의 잦은 다툼을 멈추게 하려는 아버지의 의도로 장기판과 장기 말을 접하게 되면서 장기와 처음 만났다.[31][32] 그는 백과사전을 찾아보며 장기 규칙을 익혔고[33], 효고현 대회에 참가하며 장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다만, 형과의 다툼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전해진다.[31] 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타니가와는 어릴 적 말을 던지거나 물어뜯기도 했다고 회고했다.[34]

초등학생 시절, 고베 산노미야에서 열린 장기 행사에서 당시 8단이었던 나이토 구니오와 대국할 기회를 가졌다.[34] 나이토는 타니가와의 중반에서 종반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뛰어나다고 평가했으며[34], 타니가와 역시 이 경험이 큰 자신감을 주었다고 술회했다.[34]

프로 기사를 목표로 삼은 타니가와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3년 4월, 5급으로 일본 장기 연맹의 장려회에 입회하여 와카마츠 마사카즈 프로 기사의 지도를 받았다.[1] 이후 꾸준히 승급과 승단을 거듭하여[35], 중학교 2학년이던 1976년 12월 20일에 4단으로 승단하며 정식으로 프로 기사가 되었다. 이는 가토 히후미에 이어 사상 두 번째 '중학생 프로 기사'의 탄생이었으며, 중학교 2학년 이전에 프로가 된 것은 타니가와가 최초였다.[2][3][36]

타니가와 코지의 장려회 입회 및 프로 데뷔 과정
날짜내용비고
1973년 5월5급으로 일본 장기 연맹 장려회 입회와카마츠 마사카즈 문하
1975년초단 승단
1976년 12월 20일4단 승단, 프로 기사 데뷔가토 히후미 이후 사상 두 번째 중학생 기사



참고로 그의 형 토시아키는 나다 중학교・고등학교와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아마추어 강호 단체인 리코 장기부에서 활동하며 여러 아마추어 타이틀을 획득했다.[37] 2016년 기준으로는 네슬레 일본 고베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38] 토시아키는 '장기 저널' 기획 대국에서 4단 시절의 하부 요시하루에게 평수로 승리한 적이 있으며[39], '주간 장기'의 아마추어-프로 평수전에서는 사토 야스미츠에게도 승리한 기록이 있다.[38]

3. 프로 쇼기 기사 경력

1979년 2월, 프로 데뷔 후 첫 기전 우승으로 제2회 젊은 사자전(1978)에서 우승했다.[2][4]

1983년, 카토 히후미에게 도전한 제41기 명인전에서 4승 2패로 승리하며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함과 동시에, 만 21세 2개월의 나이로 사상 최연소 명인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2][5] 이듬해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으나, 1985년에는 나카하라 마코토에게 패해 명인위를 내주었다.[5] (자세한 내용은 #초기 활동 및 최연소 명인 참조)

최연소 명인 등극 당시 '나카하라 마코토' 16세 명인이 이끌던 '나카하라 시대'의 유력한 후계자로 주목받았고, 1991년에는 4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타니가와 시대'가 도래하기보다는, 하부 요시하루를 필두로 한 소위 '하부 세대' 기사들과의 치열한 경쟁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하부 요시하루와의 150국이 넘는 대결은 골든 카드로 불리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하부 세대와의 대결 참조)

2011년 3월 10일, 나카가와 다이스케에게 승리하며 공식전 통산 1200승을 달성한 역대 4번째 기사가 되었다. 당시 만 48세 11개월로, 이는 최연소 1200승 달성 기록이었다.[6] 이후 2018년 10월 1일에는 공식전 통산 1300승을 달성한 역대 5번째 기사가 되었다.[3][7] (자세한 내용은 #후기 활동 참조)

자세한 경력은 아래 하위 섹션 및 연표를 참조.

3. 1. 초기 활동 및 최연소 명인

프로 데뷔 후, 타니가와 코지는 순위전[40]에서 1978년도를 포함하여 4기 연속으로 승급하며 빠르게 A급 기사로 발돋움했다. 이 시기인 1979년 2월에는 신진 기사들의 등용문인 제2회 젊은 사자전(1978)에서 우승하며 프로 첫 기전 우승을 기록했다.[2][4]

1982년4월 1일 A급 8단으로 승단한 타니가와의 목표는 당시 나카하라 마코토 명인을 꺾고 명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제40기 명인전에서는 카토 히후미가 나카하라를 꺾고 새로운 명인이 되었다. 당시 해설을 맡았던 타니가와는 나카하라의 패배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훗날 자서전에는 "명인전 무대에서 카토 선생님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술회했다.[41] 같은 해, 왕위전 도전 결정전까지 진출했으나 나이토 쿠니오에게 패배하여 타이틀 도전에는 실패했다. 만약 이때 도전했다면 카토 히후미, 나카하라 마코토에 이어 사상 3번째로 20세에 타이틀에 도전하는 최연소 기록을 세울 뻔했다.

1983년, 타니가와는 제41기 명인전 도전권을 획득하여 당시 명인이었던 카토 히후미에게 도전했다. 7번 승부에서 4승 2패로 승리하며 첫 메이저 타이틀인 명인위를 획득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만 21세 2개월로, 이는 사상 최연소 명인 기록이다.[2][5][42] 그는 5단부터 8단까지 모두 순위전 승급만으로 승단했기에, 명인 획득으로 9단이 되면서 5단에서 9단까지 모든 승단을 순위전 규정으로 달성한 최초의 기사가 되었다(후에 마루야마 타다히사도 달성). 타이틀 획득 후 기자회견에서는 "'''1년 동안 명인위를 맡겠습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같은 해 7월 19일, 오야마 야스하루와의 왕위 리그 대국에서는 오야마의 옥을 외통수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우치후즈메(打ち歩詰め, 보를 쳐서 외통으로 만드는 반칙) 회피의 각 부성(角不成, 각행을 승격시키지 않고 두는 수)'이라는 묘수를 두어 승리하기도 했다. 또한, 프로 입단 동기인 다나카 토라히코와의 제2회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결승 3번 승부에서 2승 1패로 승리하며, 전 기사 참가 토너먼트 기전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타니가와는 이 기전에서 통산 7회 우승, 3회 준우승을 기록하며 강한 면모를 보였다.[43]

1984년, 첫 타이틀 방어전인 제42기 명인전에서는 '달마류'라는 별명을 가진 모리아스 히데미츠를 4승 1패로 꺾고 명인위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방어 후에는 "'''이로써 약한 명인에서, 보통 명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44] 그러나 같은 해 도전한 제44기 기성전에서는 당시 기성·기왕·왕장 3관을 보유하고 있던 요네나가 쿠니오에게 스트레이트 패배(0승 3패)를 당하며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45]

1985년, 제43기 명인전에서는 도전자 나카하라 마코토에게 2승 4패로 패배하여 명인위를 내주었고, 같은 해 왕좌전에서도 나카하라에게 1승 3패로 도전 실패했다. 하지만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3연패를 달성하고, 제11기 기왕전에서는 키리야마 기요즈미를 3승 0패로 꺾고 기왕 타이틀을 처음으로 획득했다. 그 외에도 NHK배 우승, 첫 연간 최다승(56승) 기록 등으로 쇼기 대상에서 최우수 기사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3. 2. 4관왕 달성

1996년, 하부 요시하루에게 빼앗겼던 타이틀 탈환의 기회가 찾아왔다. 타니가와는 제9기 용왕전 도전자 결정 3번 승부에서 사토 야스미츠를 2승 0패로 꺾고, 하부 용왕에게 도전하게 되었다. 이어진 제9기 용왕전 7번 승부에서 타니가와는 하부를 4승 1패로 꺾고 용왕위를 되찾았다.[53]

이 7번 승부 제2국 종반, 80수째에 타니가와가 둔 '''△7칠 계'''는 쇼기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평범해 보이는 위치에 말을 놓는 이 수는 '광속의 접근(光速の寄せ)'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하부의 왕을 순식간에 외통수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수가 되었다. 당시 NHK 쇼기 강좌의 강사였던 나카하라 마코토는 "이번 용왕전은 재미있어졌다. 7칠 계라는 수가 나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타니가와 자신은 훗날 "이런 수가 떠오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7칠 지점이 빛나 보였다'''고 써서 믿어줄까"라고 회고했다.[53]

용왕 탈환 직후 열린 제46기 왕위전에서는 무라야마 사토시와의 플레이오프를 거쳐 하부에게 도전했지만, 0승 4패로 패배했다. 그러나 제55기 A급 순위전에서 8승 1패의 성적으로 하부 명인에게 도전할 자격을 얻었다.

1997년에 열린 제55기 명인전에서 타니가와는 하부를 4승 2패로 꺾고 명인 타이틀을 탈환하며 용왕과 명인, 두 개의 최고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이 승리로 통산 5번째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여 '''영세 명인''' ('''17세 명인''') 자격을 얻었다. 명인 등극 다음 날 NHK 종합 텔레비전 뉴스에 출연한 타니가와는 겸손하게 "내용이 좋지 않았다", "아직 '타니가와 시대'를 만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같은 해, 제15회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결승 5번 승부에서는 모리시타 타쿠를 3승 2패로 꺾고 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결에서 타니가와는 후수 차례였던 두 판에서 모리시타의 아이야구라 전법에 응하지 않고 급전 봉은 전법을 사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결과는 1승 1패).

또한, 제10기 용왕전에서는 사나다 케이이치를 4승 0패로 완파하며 용왕 타이틀 방어에도 성공했다. 이처럼 용왕과 명인이라는 두 개의 빅 타이틀을 보유하고 하부의 독주를 저지한 성과를 인정받아, 타니가와는 그해 최우수 기사상(통산 5번째)을 수상했다. 1997년 한 해 동안 획득한 상금 및 대국료는 1.1762000000000001억으로,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다.[54] 이는 1993년부터 2018년까지 하부 요시하루 외의 기사가 상금 랭킹 1위를 차지한 매우 드문 사례 중 하나였다(다른 해는 2013년과 2017년).[55]

3. 3. 하부 세대와의 대결

1983년 사상 최연소 명인이 되었을 무렵, 타니가와는 '나카하라 마코토' 16세 명인이 구축한 '나카하라 시대'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며, 1991년에는 4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것은 '타니가와 시대'가 아닌, 하부 요시하루를 필두로 한 하부 세대 기사들과의 치열한 대결의 시대였다. 특히, 하부 요시하루와의 150국이 넘는 대결은 골든 카드로 불리며 쇼기 팬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1992년도에는 6번의 타이틀전에서 '하부 세대' 기사 3명과 맞붙었다.

  • 제60기 및 제61기 기성전에서는 고다 마사타카를 상대로 타이틀을 두 차례 방어했다(3-1, 3-0).
  • 그러나 제33기 왕위전에서는 고다에게 2-4로 패배하여 삼관(용왕·기성·왕장)으로 후퇴했고, 고다는 사상 최저 단(4단)으로 타이틀을 획득하는 기록을 세웠다.
  • 제5기 용왕전에서는 하부에게 3-4로 패배하여 타이틀을 빼앗기고 두 관(기성·왕장)으로 물러났다.
  • 제42기 왕장전에서는 무라야마 사토시를 4-0으로 꺾고 방어에 성공했다.
  • 제18기 기왕전에서는 하부와 풀세트 접전을 벌였으나 2-3으로 패배하여 타이틀 탈취에 실패했다.


1993년도부터는 타이틀전의 대부분을 하부와 겨루게 된다.

  • 1993년도 전기 제62기 기성전에서 하부에게 1-3으로 패배하며 기성 타이틀을 잃고 왕장 한 관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하부에게 타이틀전에서 3연속 패배하면서, 이때부터 하부에 대해 껄끄러운 상대라는 의식(苦手意識)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41]
  • 제41기 옥좌전에서도 하부에게 1-3으로 패배하며 타이틀 탈취에 실패했다.
  • 하부와의 리턴 매치가 된 제63기(1993년도 후기) 기성전에서는 초반 2연패로 불리하게 시작했다. 특히 제2국(1993년 12월 24일)에서 하부가 보여준 수는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49] 타니가와가 이 싸움을 받아들이며 난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하부가 승리했다. 하지만 타니가와는 이후 센니치테(천일수) 2회로 인한 일정 연기를 거쳐 2연승하는 저력을 보였다. 특히 제4국(1994년 1월 31일)에서는 타이틀전 사상 매우 드문 49수 만에 하부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최종국 야구라 전법 대결에서 패배하며 타이틀 탈취에는 실패했다(2-3).
  • 제43기 왕장전에서는 나카하라 마코토를 4-2로 꺾고 왕장 타이틀을 지켜냈다. 한편, 하부는 이 해에 4관을 유지하며 전관 제패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998년도 이후의 타이틀전은 하부 요시하루, 사토 야스미츠, 후지이 타케시, 고다 마사타카, 마루야마 타다히사, 모리우치 토시유키 등 하부 세대 기사들을 상대로 한 싸움이 주를 이루었다.

  • 1998년 제56기 명인전 7번 승부에서는 사토 야스미츠와 맞붙어, 제6국까지 모든 대국에서 선수가 승리하는 양상으로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타니가와가 선수를 잡아 승리한 3국은 모두 타니가와의 특기인 각차림 전법을 사토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최종 제7국에서는 후리코마 결과 타니가와가 선수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구라 전법을 선택했고, 결국 사토가 승리하며 '사토 신명인'이 탄생했다(3-4).
  • 같은 해 제11기 류오전에서는 4조에서부터 올라온 기세등등한 후지이 타케시와 대결했다. 타니가와는 제1국에서 아나구마 진형을 선보이며 옥두전을 걸었으나 패배했고, 제2국에서는 아이후리비차를 두었지만 역시 패했다. 제3국과 제4국에서는 자신의 진형이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형세가 일방적으로 불리해지는 상황('모습구이', 姿焼き)이 되어 연달아 패배했다. 결국 0-4 스트레이트 패배로 '후지이 신류오' 탄생을 지켜보며 자신은 무관으로 전락했다.
  • 명인과 류오 타이틀을 모두 잃은 타니가와는 차기까지 '전 류오 · 전 명인' 칭호를 사용할 권리가 있었으나, 본인의 의사에 따라 연맹 발표에서는 통상의 '9단' 직함만을 사용했다.[56]
  • 1998년도 A급 순위전은 무라야마 사토시의 휴장(같은 해 사망)으로 9명이 리그전을 치렀다. 타니가와는 7전 전승으로 맞이한 최종 8회전에서 시마 아키라에게 패배했다. 이 결과 시마는 A급 잔류에 성공했고, 대신 타니가와의 동생 제자이자 친분이 두터운 이노우에 케이타가 A급에서 강등되었다. 타니가와는 7승 1패 동률인 모리우치 토시유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사토 야스미츠 명인에게 도전할 권리를 얻었지만, "이노우에 군에게는 미안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1999년도 제57기 명인전에서 다시 사토 야스미츠와 맞붙었으나, 첫 2국을 연패하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제3국과 제5국에서 전년과 마찬가지로 타니가와 특기인 각차림을 사토가 받아들여 타니가와가 승리하는 등 3연승하며 타이틀 탈환에 1승만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어진 제6국에서 사토가 이비차 아나구마를 사용하여 2일째 심야까지 이어지는 장시간 대국 끝에 승리했고[57], 최종국마저 사토가 가져가면서 타니가와는 명인 복위에 실패했다(3-4). 이 시리즈에서 타니가와는 후수 차례였던 2국에서 당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법인 '횡보취 팔오비'를 채용하기도 했다.

이 명인전 직후 열린 제70기 기성전에서는 고다 마사타카를 3-0으로 꺾고 기성 타이틀을 탈취하며 '무관' 상태에서 벗어났다. 당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하나 정도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이라며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최고수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과 향상심을 내비쳤다.

2000년도에는 왕위전에 2년 연속 도전하는 등, 제71기 기성전(2-3 패 vs 하부), 제41기 왕위전(3-4 패 vs 하부), 제50기 왕장전(1-4 패 vs 하부) 등 세 번의 타이틀전에서 모두 하부 요시하루와 대결했다. 특히 기성전과 왕위전은 일정이 겹쳤고 두 기전 모두 최종국까지 가는 접전이었기에 '12번 승부'라고 불렸다. 결과는 세 번 모두 패배하며 다시 무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해 제59기 A급 순위전에서는 최종 9회전에서 사토 야스미츠와의 6승 2패 동률 대결을 제압하고 마루야마 타다히사 명인에 대한 도전권을 획득했다.

2001년도 제59기 명인전에서는 마루야마 타다히사와 맞붙었다. 3년 전 사토와의 명인전처럼 제6국까지 모두 선수가 승리하고 최종국만 후수가 승리하는 양상(천일수 재대국이 있었다는 점은 다름)으로 전개되어, 마루야마가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3-4). 이 명인전에서는 후수인 타니가와의 사간비차에 대해 마루야마가 '밀레니엄 에워쌈'[58]을 두 번 사용하거나, 횡보취 팔오비가 세 번 등장하는 등 당시 유행 전법을 상징하는 대결이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제51기 왕장전 도전권 결정 리그에서는 사상 최초[59]로 2승 4패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잔류 결정전 없이''' 리그에 잔류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2승 4패로 잔류한 사례 자체는 제37기 왕장전에서 시마 아키라가 달성한 바 있으나, 시마는 잔류 결정전에서 승리하여 잔류했기 때문에, 잔류 결정전 없이 2승 4패로 잔류한 것은 타니가와가 처음이었다.[60]

2002년도 제43기 왕위전 7번 승부에서는 하부 요시하루를 4-1로 꺾고 왕위 타이틀을 탈취했다. 약 2년 만에 다시 타이틀 보유자가 된 것이다. 이 시리즈의 총 6국(제5국의 천일수 재대국 포함)은 모두 다른 전법으로 진행되었다.[61] 또한, 이 왕위전 제1국 승리로 마침 '''공식전 통산 1000승'''(특별 장기 영예상, 사상 7번째)을 달성하여, 당시 NHK 해설을 맡았던 기사가 "1000승으로 선승(先勝)"이라는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다음 2003년도의 제44기 왕위전에서는 하부의 도전을 4-1로 물리치고 타이틀 2연패에 성공했다. 하부를 상대로 동일 타이틀전에서 2년 연속 승리한 것은 타니가와가 처음이다.[62] 같은 해, 제29기 기왕전에서는 마루야마 타다히사의 특기인 선수 각차림과 후수 횡보취 팔오비를 격파하고 3-1로 기왕 타이틀을 탈취했다. 이로써 1998년 명인 실관 이후 약 6년 만에 다시 두 개의 타이틀(왕위·기왕)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타이틀은 다음 해인 2004년도에 제45기 왕위전(1-4 패 vs 하부)과 제30기 기왕전(0-3 패 vs 하부)에서 모두 하부에게 빼앗기면서, 또다시 무관으로 돌아갔다.

2003년 12월 19일, A급 순위전 시마 아키라와의 대국에서, '''봉은 전법의 은(銀)을 공짜로 버리는''' 명수(△7칠은성)를 두었다. 초반, 시마가 각 교환을 걸어와 '선후 역의 각차림'의 장기가 되었고, 53수째에 타니가와의 봉은에 의한 은 교환을 선수인 시마가 거부하고 7칠에 있던 은을 ▲8팔은으로 물린 국면에서, 54수째 '△7칠은성(成)'이 작렬했다. 이하, ▲동 계 △3팔마 ▲동 금 △8구비 ▲7구은 △8팔비차성 ▲동 금 △7구비성 ▲4팔옥 △8팔용 ▲4칠옥 △4오금으로 진행되어 순식간에 형세가 기울었다. 이 54수째 △7칠은성으로 장기 대상의 마스다 고조 상을 수상했는데, 특정 전법이나 에워쌈이 아닌 단 한 수에 대해 이 상이 수여된 것은 처음이었다.

류오전에서, 제1기(1988년도)부터 제18기(2005년도)까지 18기 연속으로 1조에 재적(류오 재위 포함)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제1기부터의 연속 기록으로는 최장이다.

2005년도의 제64기 A급 순위전에서는 8승 1패로 하부와 동률을 이루었다. 두 사람의 플레이오프는 2006년 3월 16일에 열렸으며, 당시 유행하던 후수 번 한 수 손 각차림 전형으로 진행되었다. 최종반, 하부가 127수째에 ▲3일각을 버리며 타니가와의 옥을 맹렬히 압박했지만, 타니가와는 절묘하게 위기를 벗어나 156수 만에 승리했다. 이 대국의 내용은 높이 평가받아, 장기 대상에서 신설된 '명국상'을 수상했다.[63]

그리고, 11번째 명인전 등장인 제64기(2006년도) 명인전(타니가와 2-4 모리우치)을 맞이했다. 제1국에서는, 종반에 모리우치가 자진의 7이와 8이에 은을 나란히 박아 넣는 진기하고 강력한 수비를 보여주며 승리했고, 제2국에서는 일변하여 고키겐추비차 · 초급전에서 이비차 측인 모리우치가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그 후, 선수 차례에서 강점을 보인 모리우치에게 착실히 2승을 더 내주며 패배하여, 9년 만의 명인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3. 4. 후기 활동

1979년 2월, 프로 데뷔 후 첫 타이틀로 제2회 젊은 사자전(1978)에서 우승했다.[2][4]

타니가와의 첫 메이저 타이틀전 출전은 1983년, 카토 히후미에게 제41기 명인 타이틀에 도전하면서 이루어졌다. 타니가와는 이 대결에서 4승 2패로 승리하며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21세의 나이로 명인 타이틀을 획득한 최연소 기사가 되었다.[2][5] 이듬해인 1984년, 그는 모리야스 히데미츠를 제42기 명인전에서 4승 1패로 꺾고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나 1985년, 제43기 명인전에서는 나카하라 마코토에게 2승 4패로 패하며 타이틀을 잃었다.[5]

1992년에는 6번의 타이틀전에서 '하부 세대'로 불리는 3명의 기사와 맞붙었다. 제60기 기성전(타니가와 3-1 고다)과 제61기 기성전(타니가와 3승 (지쇼기 1국) 0패 고다)에서는 고다 마사타카를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하지만 제33기 왕위전에서는 고다에게 2승 4패로 패배하여 보유 타이틀이 용왕, 기성, 왕장 3개로 줄었고, 고다는 사상 최저단(4단)으로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었다. 제5기 용왕전에서는 하부에게 3승 4패로 패배하여 기성과 왕장, 2개의 타이틀만 남게 되었다. 제42기 왕장전에서는 무라야마 사토시를 4승 0패로 꺾고 방어에 성공했지만, 제18기 기왕전에서는 하부에게 풀세트 접전 끝에 2승 3패로 패배하며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1993년부터는 타이틀전에서 주로 하부와 맞붙게 되었다. 1993년 전반기의 제62기 기성전에서 하부에게 1승 3패로 패배하며 타이틀을 잃고 왕장 타이틀 하나만 남게 되었다. 하부에게 타이틀전에서 3연속 패배하면서, 이때부터 하부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41] 제41기 옥좌전에서도 하부에게 1승 3패로 패배하여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하부와의 리턴 매치가 된 제63기 기성전(1993년 후반기)에서는 먼저 2연패를 당했다. 특히 1993년 12월 24일의 제2국에서 하부가 둔 수는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49] 타니가와가 이 싸움을 받아들이며 난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하부가 승리했다. 그러나 타니가와는 2연패 후, 센니치테 2회로 인한 일정 연기를 거쳐 2연승을 거두는 저력을 보였다. 1994년 1월 31일의 제4국에서는 타이틀전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49수''' 만에 하부의 기권을 받아냈다. 하지만 최종국 야구라 대결에서 패배하며 2승 3패로 타이틀 획득에 다시 실패했다.

제43기 왕장전에서는 나카하라 마코토를 상대로 4승 2패를 거두며 왕장 타이틀을 지켜냈다. 한편, 하부는 이 해에 4개의 타이틀을 유지하며 전관 제패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67기(2008년도) A급 순위전에서는 최종국을 앞두고 강등 가능성이 생기는 위기를 처음으로 맞았고, 이 사실은 지방지에도 보도되었다. 그리고 2009년 3월 3일 열린 최종국에서 스즈키 다이스케와 "이기는 쪽이 잔류, 지는 쪽이 강등"되는 대결을 펼쳤다. 선수를 잡은 타니가와는 서로 振り飛車|후리비샤일본어(상대방의 비차(飛車)가 왼쪽으로 움직이는 전법)로 맞서는 형세로 유도하여 승리, A급 잔류에 성공했다.

2007년도와 2008년도에는 타이틀전 출전이나 기전 우승이 없었으나, 2009년도에는 JT 쇼기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이 기전 최다 우승 기록을 6회로 늘렸다. 원래 타니가와는 전년도 획득 상금·대국료 랭킹 13위로 출전 자격이 없었으나, 와타나베 아키라가 가족의 신종 인플루엔자 감염 가능성으로 불참하면서 출전권을 승계받았다. 우승 후 인터뷰에서 "원래 출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우승 상금 500만은 주최 측 및 연맹과 상의하여 초등학생 보급을 위해 써달라는 뜻을 밝혔다.[64] 그리고 다음 해 9월, 도쿄도에 2000세트, 오사카시에 1000세트, 총 3000세트의 장기판과 말을 기증했다.[65]

제69기(2010년도) A급 순위전에서 잔류하면서, 제70기에는 '''A급 재적 연속 기록을 30기'''(명인 재위 기간 포함)로 늘려 나카하라 마코토의 기록을 넘어 역대 단독 3위에 올랐다.[66]

2011년 3월 10일, 제24기 용왕전 2조 승급자 결정전 1회전에서 나카가와 다이스케에게 승리하여, 사상 4번째로 공식전 통산 1200승(1901국 698패 3지쇼기, 승률 0.632)을 달성했다.[6] 당시 48세 11개월로 최연소 기록이었으며[6], 4단 승단 후 34년 2개월 만의 달성은 나카하라 마코토(十六世名人)의 33년 8개월에 이어 두 번째로 빠른 기록이었다.[67][68]

2012년도 제71기 A급 순위전에서는 2승 6패를 기록하여 타니가와(4위), 다카하시 미치오(8위), 하시모토 다카노리(9위) 3명이 동률을 이루며 강등 가능성을 안고 최종국(2013년 3월 1일)에 임했다. 승리하면 자력으로 잔류를 확정할 수 있었지만, 야시키 노부유키에게 패배하여 잔류 여부는 다른 대국의 결과에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카하시와 하시모토가 모두 패배하면서 가까스로 A급 잔류에 성공했다.

2018년 10월 1일, 타니가와는 공식전 통산 1300승을 달성한 다섯 번째 쇼기 기사가 되었다.[3][7]

3. 5. 영세 명인 습위

1983년, 카토 히후미에게 도전한 제41기 명인전에서 4승 2패로 승리하며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는 21세의 나이로 명인 타이틀을 획득한 최연소 기록이기도 했다.[2][5] 이듬해 1984년 모리야스 히데미츠를 상대로 제42기 명인전에서 4승 1패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으나, 1985년 제43기 명인전에서는 나카하라 마코토에게 2승 4패로 패배하여 타이틀을 잃었다.[5]

1992년도는 '하부 세대' 기사들과 6번의 타이틀전을 치렀다.

기전상대결과비고
제60기 기성전고다 마사타카3-1 (방어)
제61기 기성전고다 마사타카3-(지1)-0 (방어)지쇼기 1회 포함
제33기 왕위전고다 마사타카2-4 (실관)고다, 사상 최저단 타이틀 획득. 타니가와는 용왕, 기성, 왕장 3관으로 후퇴.
제5기 용왕전하부 요시하루3-4 (실관)기성, 왕장 2관으로 후퇴.
제42기 왕장전무라야마 사토시4-0 (방어)
제18기 기왕전하부 요시하루2-3 (도전 실패)풀세트 접전 끝 패배.



1993년도부터는 타이틀전에서 주로 하부 요시하루와 맞붙게 되었다.

기전상대결과비고
제62기 기성전 (전기)하부 요시하루1-3 (실관)왕장 1관만 남게 됨. 하부 상대 타이틀전 3연패로 약세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언급.[41]
제41기 옥좌전하부 요시하루1-3 (도전 실패)
제63기 기성전 (후기)하부 요시하루2-3 (도전 실패)2연패 후 2연승했으나 최종국 패배. 제4국에서는 49수 최단 수 승리 기록. 센니치테 2회 포함.[49]
제43기 왕장전나카하라 마코토4-2 (방어)왕장 타이틀 유지.



2013년도 제72기 A급 순위전에 참가하며 연속 A급 재적 기록을 마스다 고조를 넘어 역대 단독 2위(32기)로 늘렸으나, 2014년 1월 와타나베 아키라에게 패배(1승 6패)한 데 이어 다른 대국 결과로 B급 1조 강등이 확정되었다 (최종 2승 7패). 영세 명인 자격 보유자가 B급 1조로 강등된 것은 2000년도 제59기의 나카하라 마코토 이후 처음이었다.[69][70]

이후 2020년 1월, 제78기 순위전 B급 1조에서 센다 쇼타에게 패배하며 최종국 결과와 관계없이 B급 2조 강등이 결정되었다 (최종 3승 9패). 명인 경험자의 B급 2조 강등은 카토 히후미, 마루야마 타다히사에 이어 세 번째였으며, 영세 명인 자격 보유자로서는 사상 최초의 B급 2조 강등이었다.[74]

4. 일본 쇼기 연맹 회장 역임

2011년 5월 26일, 일본 쇼기 연맹 제62회 총회에서 임기 2년의 상무이사로 선출되어 대외 협력부를 담당했다.[18][95]

2012년 12월 18일 요네나가 구니오 회장이 사망하자, 같은 해 12월 25일에 열린 특별 회원 회의에서 그의 후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타니가와는 간사이 지방 출신으로는 최초의 일본 쇼기 연맹 회장이 되었다.[19][20][96][97]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5번째 회장이었다.

2013년 6월 7일(제64회 총회)과 2015년 6월 4일(제66회 총회)에 회장으로 재선되었다.[21][22][98][99] 회장 재임 중이던 2016년 7월 11일에는 신규 웹 미디어 사업 추진을 위해 주식회사 싱크로[100]와 업무 제휴 조인식을 가졌다.[101]

그러나 2016년 10월, 미우라 히로유키 9단의 장기 소프트웨어 부정 사용 의혹이 불거졌다. 10월 11일, 타니가와를 포함한 연맹 이사진은 상무회에서 미우라 9단에게 설명을 요구했으나 그는 의혹을 부인했다. 다음 날인 12일, 연맹은 미우라 9단에게 12월 31일까지 공식전 출장 정지 처분을 내리고, 용왕전 도전자를 마루야마 타다히사 9단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102] 이는 제29기 용왕 도전 기사 논란으로 비화되었다.

같은 해 12월 26일, 연맹이 조사를 위촉한 제3자 위원회는 미우라 9단의 부정 행위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103] 타니가와는 회장으로서 의혹의 발단이 7월 간사이 보고회에서 쿠보 토시아키 9단의 발언이었음을 공표하고,[104] 27일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했다.[105]

2017년 1월 18일, 타니가와는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장직 사임을 발표했다.[23][106] 그는 후임자가 선출되는 2017년 2월 6일까지 회장직을 수행했다.[24] 한편, 미우라 9단은 타니가와 회장의 대응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107]

5. 기풍 및 평가

다른 기사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수순으로 순식간에 상대의 옥을 몰아넣는 모습에서 "광속의 끝내기", "광속류"라는 별명이 붙었다. 모리우치 도시유키는 타니가와에 대해 ''"종반의 속도 감각을 장기에 도입한 원조"''라고 평가하며, 끝내기의 개념을 바꾸었다고 말한다.[76]

그러나 타니가와 본인은 2009년에 "광속의 끝내기는 이제 없어졌어요"라고 농담조로 말했듯이[77], 반드시 "광속"에만 얽매이지 않는 기풍으로 변화해왔다. 유력한 수가 여러 개 보일 때 기물이 전진하는 수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경향 때문에 "타니가와 전진류"라고도 불린다. 타니가와가 색지 등에 즐겨 쓰는 "광속", "전진" 등의 문구는 이러한 그의 장기 특징을 나타낸다.

타니가와는 후리비차도 두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비차당이다. 프로 데뷔 직후에는 후리비차를 주로 두었으나 이후 이비차당으로 전향했다. 쇼와 시대와 헤이세이 시대의 경계 무렵에는 선수(先手)일 때 각바꿈을 가장 잘 두어 다른 이비차당 기사들에게 두려움을 샀다. 야구라 전법이 후수(後手)에게 약간 불리하다는 인식이 퍼진 2000년경부터는 후수일 때 야구라를 두는 횟수가 상당히 줄었고, 대신 4간비차 등을 자주 사용했다. 그 후 요코보토리 8오비, 아이후리비차, 고키겐중비차 등 유행하는 전법을 받아들이며 두는 방식이 다양해졌다.

타니가와의 "광속의 끝내기"에 대한 명성 때문에 상대 기사가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예를 들어, 타니가와가 영세 명인 자격을 획득한 제55기 명인전 제1국 최종반에서, 하부 요시하루는 타니가와의 수가 졸장군이 아님에도 졸장군으로 착각하여 필승의 기회를 놓치고 역전패했다. 이는 타니가와의 날카로운 종반 능력에 대한 상대의 부담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데뷔 직후에는 하메테(함정수)로 알려진 요코보토리 4오각 전법을 재발견하여 연달아 채용했고, 모리야스 히데미쓰와 히가시 카즈오를 36수 만에 꺾으며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국 중 자세나 태도에 대해 하라다 야스오 9단은 "예의범절도 실력의 일부라고 하지만, 타니가와 군의 몸가짐은 정말 훌륭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80] 초대 영세 용왕 자격을 얻은 와타나베 아키라는 프로가 되었을 때 타니가와의 장기를 연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82]

6. 수상 경력

타니가와는 일본 장기 연맹(JSA)이 공식 대국 성적을 기준으로 수여하는 연간 쇼기 대상, 업적을 기리는 JSA의 다른 상, 그리고 일본 사회 기여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 기관 등으로부터 받은 상을 포함하여 경력 동안 여러 상과 영예를 받았다.[11][12]

주요 타이틀 획득 내역, 일반 기전 우승 기록, 쇼기 대상 수상 내역, 기타 표창 등 상세한 내용은 아래 관련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속 표창'''


  • 2001년 11월 - 현역 근속 25년
  • 2016년 11월 - 현역 근속 40년


'''승수 표창'''

  • 1991년 12월 31일 - 공식전 통산 600승 달성 (쇼기 영예상, 사상 17번째, 최초의 20대 수상)
  • 1997년 3월 3일 - 공식전 통산 800승 달성 (쇼기 영예 감투상, 사상 8번째)
  • 1999년 12월 11일 - 공식전 통산 900승 달성
  • 2002년 7월 13일 - 공식전 통산 1000승 달성 (특별 쇼기 영예상, 사상 7번째)
  • 2006년 2월 6일 - 공식전 통산 1100승 달성 (사상 5번째)
  • 2011년 3월 10일 - 공식전 통산 1200승 달성 (특별 쇼기 영예상, 사상 4번째)
  • 2018년 10월 1일 - 공식전 통산 1300승 달성 (사상 5번째)
  • 2019년 9월 12일 - 공식전 통산 1325승 달성 (역대 통산 승수 단독 3위)

6. 1. 타이틀 획득

타니가와는 메이저 타이틀전에 총 57회 출전하여 27번 우승했다. 그는 명인 타이틀을 5번 획득하여 영세 명인 자격을 얻었다.[9] 주요 타이틀 외에도, 타니가와는 선수 경력 동안 22개의 다른 쇼기 선수권 대회를 우승했다.[10]

타이틀연도획득 횟수
용왕1990년–91년, 1996년–97년4
명인1983년–84년, 1988년–89년, 1997년5
왕위1987년, 1989년–91년, 2002년–03년6
기왕1985년, 1987년, 2003년3
왕장1991년–94년4
왕좌1990년1
기성1991년–92년(기성 타이틀은 1994년까지 연 2회 개최되었으며, 타니가와는 1991년에 1회, 1992년에 2회 타이틀을 획득했다.), 1999년4



프로 데뷔 후, 타니가와는 순위전[40]에서 2기째인 1978년도부터 4기 연속 승급하여 단숨에 A급으로 올라갔다. 이 기간 동안 1978년도에 젊은 기사들의 등용문인 약사자전에서 기전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82년 4월 1일자로 A급 8단이 된 타니가와의 꿈은, 나카하라 명인을 꺾고 명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해 4월에 시작된 제40기 명인전 7번 승부에서는, 나카하라 명인과 가토 히후미 도전자가 지쇼기 1국, 천일수 2국을 포함하는 풀 세트의 "10번 승부"를 벌였다. 최종국에서 가토 10단이 승리하여 명인을 획득했지만, 도쿄 쇼기 회관에서 최종국의 해설을 맡았던 타니가와는 당시 심경에 대해 "가토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나카하라 선생님이 명인으로 남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설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 가토 선생님의 승리로 끝났을 때는 멍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후년의 자서전에는 "명인전의 무대에서 가토 선생님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라고 적었다[41]

같은 시기에 왕위전에서 도전 결정전에 진출했다. 나이토 쿠니오에게 패배하여 왕위 도전에는 실패했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가토 히후미, 나카하라 마코토에 이어 사상 3번째 20세의 타이틀 최연소 도전이 될 뻔했다.

타니가와는 제41기 명인전 도전 결정 리그전 (A급 순위전)에서 7승 2패의 성적을 거두고, 나카하라 마코토와의 플레이오프를 제압하여 명인 도전권을 얻는다. 그리고 제41기 명인전 (타니가와 4-2 가토) 제6국 (1983년 6월 14일 - 6월 15일)에서 승리하여 첫 타이틀 명인을 획득했다. 사상 최연소 명인(21세)[42]의 기록을 세웠다. 타니가와는 5단에서 8단까지 모두 순위전 승급으로 승단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5단에서 9단까지 모두 순위전의 승급 규정으로 승단하게 되었다(이후 마루야마 타다히사도 달성). 타이틀 획득 후의 기자 회견에서 "1년 동안 명인위를 맡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후에 쇼기 포커스의 인터뷰에서는 "다른 타이틀전은 나카하라 마코토 선생님에게 뒤쳐진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1983년 7월 19일의 대 오야마 야스하루전 (왕위 리그)에서, 오야마의 옥을 쫓는 수순 중 우치후즈메 회피의 각 부성(99수째 ▲4삼각 인부성)이라는 마치 만들어진 말장난과 같은 수를 두어 이겼다(실제 국면도는 우치후즈메 참조).

1983년도 제2회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에서, 프로 입단이 동기인 다나카 토라히코와 결승 3번 승부를 벌였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타니가와는 종반에 강하고, 다나카는 초반에 강하다고 비교되어 라이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타니가와는 결승에서 2-1로 승리하여, 전 기사 참가의 토너먼트 기전에서 첫 우승을 달성했다. 이 기전과는 궁합이 좋아서 19회의 역사 중 타니가와의 우승은 통산 7회, 준우승은 통산 3회이다[43]

다음 해 (1984년), 첫 타이틀 방어전이 되는 제42기 명인전 (타니가와 4-1 모리아스)에서는, 끈기 있는 기풍으로 "달마류"라고 불린 모리아스 히데미츠를 상대로 4승 1패로 명인위 방어에 성공한다. 이때 "이로써 약한 명인에서, 보통 명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44]

제44기 (1984년도 전기) 기성전 (타니가와 0-3 요네나가)에서는 요네나가 쿠니오 기성 (기왕·왕장)에게 도전했다. 주목을 받은 명인 대 삼관왕의 승부에서 타니가와는, 제1국에서 상대의 보 숫자를 잘못 읽는 실수, 제2국에서 요네나가의 "진흙탕류" 받기 (91수째 ▲5팔옥)로부터 역전패 등을 경험하여[45], 스트레이트 패배·타이틀전 첫 패배를 겪었다.

1985년도, 3번째 방어전이 되는 제43기 명인전 (타니가와 2-4 나카하라)에서 도전자인 나카하라에게 패배, 동년도 왕좌전 (타니가와 1-3 나카하라)에서는 획득에 실패했다. 한편,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에서 3연패하고, 제11기 기왕전 (타니가와 3-0 키리야마)에서는 "검은 은" 키리야마 기요즈미로부터 기왕위를 획득했다. 게다가 NHK배전 우승, 첫 최다 승리(56승), 앞서 언급한 왕좌 도전 등의 활약으로, 쇼기 대상의 최우수 기사상을 첫 수상한다.

1987년에는 왕위기왕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1988년1989년에는 다시 명인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0년에는 왕위 방어, 왕좌 획득, 용왕 획득으로 3관왕에 올랐다. 1991년에는 왕위용왕을 방어하고, 왕장기성 타이틀까지 획득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후 1994년까지 왕장 4연패, 1992년까지 기성 3연패를 달성했다.

1994년도에는 제64기 기성전 (타니가와 1-3 하부), 제42기 왕좌전 (타니가와 0-3 하부)에서 하부에 도전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한편, 하부는 명인전, 용왕전을 각각 요네나가 쿠니오, 사토 야스미츠에게서 빼앗아 사상 최초의 6관왕이 되었고, 남은 타이틀은 타니가와가 가진 왕장뿐인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하부는 제44기 왕장 리그에서 5승 1패를 거두고, 고다 마사타카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전 7관 제패를 걸고 타니가와 왕장에게의 도전을 결정했다.

맞이한 제44기 왕장전(타니가와 4-3 하부)은 제1국(1995년 1월 12-13일)의 타니가와의 선승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제2국(1월 23-24일) 전인 1월 17일, 타니가와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 1월 20일에는 요네나가 쿠니오와의 A급 순위전이 있었고, 19일에는 아내의 운전으로 고베에서 오사카로 탈출했지만, 13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50]。그럼에도 타니가와는, 대 요네나가전에서 승리, 하부와의 왕장전 제2국도 승리했다. 하지만 하부도 끈기 있게 3승 3패로 만들어 풀세트로 끌고 갔다.

그리고 아오모리현·오이라세 계류에서 열린 최종 제7국(1995년 3월 23-24일)은 아이가쿠라의 장기가 되었지만, 2일째에 76수에서 센니치테가 성립되어, 그날 안에 재대국이 되었다. 재대국은 선수·후수가 반대임에도 불구하고, 40수째까지 센니치테국과 완전히 같은 수순으로 진행되어, "서로의 의사가 딱 맞았다"[51]。41수째에서 처음으로 선수의 타니가와가 수를 바꿨다. 결과, 111수에서 선수의 타니가와의 승리가 되어, 4승 3패로 왕장을 방어, 마지막 보루로서 하부의 7관 독점을 저지했다. 이날은 장기계 취재로는 이례적인 수의 보도진이 대거 몰려들었다. 후에 타니가와는 "지진이 없었다면 빼앗겼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한, 후년 인터뷰에서 "한 번, 7관의 기회는 만들 수 있어도, 두 번은 무리라고 생각했다"고도 말했다[41]

1995년도, 하부는 개막부터 명인전, 기성전, 왕위전, 왕좌전, 용왕전까지 모두 방어에 성공, 게다가 왕장 리그도 다시 제패하여 2년 연속으로 타니가와 왕장의 도전자가 되었다.

이 제45기 왕장전 7번 승부(타니가와 0-4 하부)에서는 하부가 개막부터 3연승을 거두어, 순식간에 타니가와를 몰아넣었다.

야마구치현의 마린피아 구로이에서 열린 제4국(1996년 2월 13일-14일)의 전형은, 이겨도 져도 큰 차이의 내용이 되기 쉬운 "요코후토리"가 되어, 타니가와는 선수로 나카하라 이를 짜는 새로운 구상을 보였다. 2일째의 모습은, NHK 위성 텔레비전에서 방송되어, 시간대는 오전 9시부터 종국까지 (12:00 - 13:30은 중단)라는 이례적인 길이였다. 그 중계 회장(대국 해설)은 만원이었고, 그 열기로 해설역의 모리시타 타쿠, 야마다 쿠미는 땀투성이였다고 한다[52]。타니가와에게는 37수째가 아쉬운 한 수였다. 2일째 15시 30분경에는 이미 하부가 우세가 되어, 자기에 더 이상 방어가 없어진 타니가와는, 77, 79수째의 형태를 만드는 수로, 목을 내밀었다. 이하는 쉬운 짐이 되어, 하부가 82수째 △7팔금과 둔 수를 보고, 17시 6분, 타니가와는 투료했다. 타니가와에게는 굴욕적인, 7관왕 탄생이었다. 종국 직후의 인터뷰에서는 "모처럼 주목을 받았는데, 팬분들께도 하부 씨에게도 죄송하다"[52]고 말했다.

하부에 빼앗긴 후, 1996년, 제9기 용왕전 도전기 결정 삼번 승부에서 사토 야스미츠를 2승 0패로 꺾고, 하부 용왕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제9기 용왕전 7번 승부(타니가와 4-1 하부)에서 하부로부터 용왕위를 탈환했다. 이 7번 승부 제2국의 종반 80수째에 타니가와가 둔 △7칠 계는 바로 "광속의 덧붙임"이라고 불렸다. 이 수를 기점으로 하부의 옥은 순식간에 덧붙임 형태가 되어, 타니가와의 승리가 되었다. 당시, NHK 쇼기 강좌에서 강사를 맡았던 나카하라 마코토는, 프로그램에서 "이번 용왕전은 재밌어졌네요. 7칠 계라는 수가 나왔습니다."라고 언급했다. 타니가와 본인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런 수가 떠오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7칠의 지점이 빛나 보였다고 써서, 믿어줄까."라고 말했다[53]

또한, 직후의 제46기 왕위전(타니가와 0-4 하부)에서도, 왕위 리그에서 무라야마 사토시와의 4승 2패 동률의 플레이오프를 제압하고 하부에게 도전했지만, 패배했다. 하지만, 제55기 A급 순위전에서는 1패 후 8연승으로, 하부 명인에게의 도전을 결정했다.

그리고, 연도가 바뀐 1997년의 제55기 명인전(타니가와 4-2 하부)에서 승리를 거두어, 두 개의 타이틀(용왕·명인)을 독점했다. 또한, 통산 5기의 규정에 의해 영세명인 (17세 명인)의 자격을 얻었다. 다음 날 아침 NHK 종합 텔레비전 뉴스에 출연한 타니가와는, "내용이 좋지 않았다", "아직 '타니가와 시대'를 만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명인전과 일정이 병행했던 1997년 4월 - 5월(기전으로서의 연도는 1996년도)의 제15회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결승 5번 승부(타니가와 3-2 모리시타)에서는, 모리시타 타쿠를 꺾고 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결승 5번 승부에서는, 타니가와가 후수번의 2국에서, 선수·모리시타 타쿠의 아이야구라로의 유도에 타니가와가 응하지 않고, 후수 급전 봉은 (원시 봉은)을 보여 화제가 되었다(그 2국의 결과는 1승 1패).

동 연도에는, 제10기 용왕전(타니가와 4-0 사나다 케이이치)에서 용왕 방어에도 성공하여, 2개의 빅 타이틀을 독점했다. 이것이 평가되어, 타이틀 수는 하부의 사관보다 적지만, 최우수 기사상(5번째)을 수상했다. 또한, 1997년(1 - 12월)의 획득 상금·대국료 랭킹에서 1위(1.1762000000000001억)가 되었다[54]。1993년~2018년 사이에 하부 이외의 기사가 1위가 된 것은, 이 해와 2013년과 2017년뿐이다[55]

1998년도 이후의 타이틀전은 하부 요시하루,사토 야스미츠,후지이 타케시,고다 마사타카,마루야마 타다히사,모리우치 토시유키 등 하부 세대의 기사들을 상대로 한 싸움이 되었다.

1998년도 제56기 명인전 7번 승부(타니가와 3-4 사토)는 제6국까지 모든 국면에서 선수가 승리하는 전개로 풀세트가 되었다. 타니가와가 선수를 잡고 이긴 3국은 모두 타니가와가 특기로 하는 각차림을 사토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 제7국은 후리코마에서 타니가와가 선수를 잡았지만 야구라를 선택했다. 결과는 사토가 이겨 '사토 신명인'이 탄생했다.

같은 해, 제11기 류오전(타니가와 0-4 후지이)은 4조로부터의 도전자로 기세가 오른 후지이 타케시와의 싸움이 되었다. 타니가와는 제1국은 아나구마를 보이면서 옥머리전을 걸어 패배. 제2국은 아이후리비차로 했지만 패배. 제3국과 제4국은, 자진의 에워쌈이 견고한 채로도 절망적인 국면, 이른바 '모습구이'가 되어 패배. 결국 스트레이트 패배로 '후지이 신류오'를 탄생시켜, 자신은 무관이 되었다.

명인과 류오를 실관한 타니가와에게는 차기까지 '전 류오 · 전 명인'의 직함을 칭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의향에 의해 연맹에서 발표된 것은 통상의 '9단'의 직함이었다[56]

1998년도의 A급 순위전은 무라야마 사토시의 휴장(같은 해 사망)으로 9명으로 리그전이 되었다. 타니가와는 7전 전승으로 맞이한 최종 제8회전에서 시마 아키라에게 패배. 이로 인해 시마는 A급에 잔류하게 되었고, 대신 동생 제자로 사이가 좋은 이노우에 케이타가 A급에서 강등되었다. 7승 1패끼리의 모리우치 토시유키와의 플레이오프를 제압하고 사토 야스미츠 명인에게의 리턴 매치 권리를 얻었지만, "이노우에 군에게는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맞이한 1999년도의 사토 야스미츠와의 제57기 명인전(타니가와 3-4 사토)은 첫 2국에서 연패했다. 그러나, 제3국과 제5국에서 전년과 마찬가지로 타니가와 특기의 각차림을 사토가 받아들여 타니가와가 이기는 등 3연승하여 탈환까지 앞으로 1승으로 다가섰다. 다음 제6국에서는 사토가 이비차 아나구마를 사용해, 2일째 심야까지 이어지는 장시간의 장기를 제압했다[57]。 최종국도 사토가 이겨, 타니가와는 명인을 되찾을 수 없었다. 또한, 이 시리즈에서 타니가와는 후수 번의 2국에서, 당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법 '횡보취 팔오비'를 채용하고 있다.

이 명인전 직후, 제70기 기성전(타니가와 3-0 고다)에서 고다 마사타카로부터 기성위를 탈취해 '무관'을 반납한다. 이때,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하나 정도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제일인자가 되어야 할 몸의 자각과 향상심을 시사했다.

2000년도는, 왕위전에서 2년 연속 도전하는 등, 제71기 기성전(타니가와 2-3 하부), 제41기 왕위전(타니가와 3-4 하부), 제50기 왕장전(타니가와 1-4 하부)이라는 3개의 타이틀전에서 하부와 대결했다. 특히 기성전과 왕위전은 일정이 겹쳤고, 또한, 모두 최종국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12번 승부'라고 불렸다. 결과는, 3개 모두 패퇴하여 무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해의 제59기 A급 순위전에서는 최종 9회전에서 사토 야스미츠와의 동성 결전(6승 2패끼리)을 제압하고 마루야마 타다히사 명인에 대한 도전권을 얻었다.

그리고, 2001년도의 제59기 명인전(타니가와 3-4 마루야마)은 3년 전의 사토와의 명인전과 마찬가지로, 제6국까지 모두 선수가 이기고, 최종국만 후수가 이기는 전개(천일수 재대국이 있었던 점은 다르다)로, 마루야마의 방어가 되었다. 이 명인전은, 후수의 타니가와의 사간비차에 대해 마루야마가 '밀레니엄 에워쌈'[58]'을 두 번 사용하거나, 횡보취 팔오비가 3번 나타나는 등, 당시의 유행을 상징하는 싸움이 되었다. 또한, 해당 연도의 왕장전(제51기)에서는 도전권 결정 리그에서 사상 처음[59]이 되는 '2승 4패로 패했지만 잔류 결정전을 하지 않고 리그 잔류'라는 진기록을 성공시켰다. 2승 4패에서의 잔류 자체는 제37기 왕장전에서 시마 아키라가 달성하고 있지만, 시마는 잔류 결정전을 제압하고의 잔류였기 때문에, 잔류 결정전 없이 2승 4패로 잔류한 것은 타니가와가 처음이었다[60]

2002년도, 제43기 왕위전 7번 승부(타니가와 4-1 하부)에서 하부 요시하루로부터 왕위를 탈취. 대략 2년 만에 타이틀 보유자가 되었다. 이 시리즈의 전 6국(제5국의 천일수 재대국도 포함)은, 모두 다른 전형이었다[61]。 또한, 이 왕위전의 제1국에서, 마침 공식전 통산 1000승(특별 장기 영예상, 사상 7번째)을 기록했으므로, 당시 NHK에 해설역으로 출연한 기사가 "1000승으로 선승"이라는 말장난을 했다.

다음 2003년도의 제44기 왕위전(타니가와 4-1 하부)은 하부에 탈환을 허용하지 않고 2연패를 달성했다. 하부를 상대로, 동일 타이틀전에서 2년 연속 승리한 것은 타니가와가 처음이다[62]。 또한, 같은 해, 제29기 기왕전(타니가와 3-1 마루야마)에서는 마루야마 타다히사의 특기인, 선수 · 각차림, 후수 · 횡보취 팔오비를 격파하고 기왕위를 탈취. 1998년의 명인 실관 이후, 약 6년 만에 두 관(왕위 · 기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타이틀은, 다음 해(2004년도)에, 제45기 왕위전(타니가와 1-4 하부)과 제30기 기왕전(타니가와 0-3 하부)에서, 모두 하부에 탈취당하여, 또다시 무관으로 내몰렸다.

2003년 12월 19일, A급 순위전 대 · 시마 아키라전에서, 봉은의 은을 그냥 버리는 명수를 둔다. 초반, 시마가 자신에게 각 교환을 하고 '선후 역의 각차림'의 장기가 되어, 53수째, 타니가와의 봉은에 의한 은 교환을 선수의 시마가 거부하고, 7칠에 있던 은을 ▲8팔은으로 물린 국면에서, '△7칠은성'(54수째)이 작렬했다. 이하, ▲동 계△3팔마▲동 금△8구비▲7구은△8팔비차성▲동 금△7구비성▲4팔옥△8팔용▲4칠옥△4오금으로 진행,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형세가 되었다. 이 54수째 △7칠은성으로 장기 대상의 마스다 고조 상을 수상했다. 동상에서는, 전법도 에워쌈도 아닌 특정 한 수에 대한 첫 수여였다.

류오전에서, 제1기(1988년도)부터 제18기(2005년도)까지 18기 연속으로 1조에 재적(류오 재위 포함). 제1기부터의 연속 기록으로는 최장이다.

2005년도의 제64기 A급 순위전에서는 8승 1패로 하부와 동률을 이루어, 두 사람에 의한 플레이오프는 2006년 3월 16일에 행해져, 유행하는 후수 번 한 수 손 각차림의 전형이 되었다. 최종반에서 하부는 127수째에 ▲3일각을 버리고 타니가와의 옥을 맹렬하게 조이려 했지만, 타니가와는 교묘하게 궁지를 벗어나 156수로 승리. 이 한 국의 내용은 높이 평가되어, 장기 대상에서 신설된 '명국상'을 수상했다[63]

그리고, 11번째 명인전 등장인 제64기(2006년도) 명인전(타니가와 2-4 모리우치)을 맞이했다. 제1국에서는, 종반에 모리우치가 자진의 7이와 8이에 은을 나란히 쳐 넣는 진기한 강한 받기를 보여 승리, 또한,

6. 2. 일반 기전 우승

주요 타이틀 외에도, 타니가와는 선수 경력 동안 22개의 다른 쇼기 선수권 대회를 우승했다.[10] 1978년 젊은 기사들의 등용문인 약사자전에서 기전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83년에는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에서 프로 입단 동기인 다나카 토라히코를 결승 3번 승부에서 2-1로 꺾고, 전 기사 참가 토너먼트 기전 첫 우승을 달성했다. 이 기전에서 통산 7회 우승, 3회 준우승을 기록했다.[43] 1985년에는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3연패와 NHK배 우승을 달성했다. 2009년에는 JT 쇼기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여 해당 기전 최다 우승 기록을 6회로 갱신했다. 당시 타니가와는 전년도 획득 상금 랭킹 13위로 출전 자격이 없었으나, 와타나베 아키라의 결장으로 출전권을 승계받았다. 우승 후 인터뷰에서 타니가와는 우승 상금(500만)을 초등학생 보급용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64], 다음 해 9월에 3000세트의 장기판과 말을 기부했다.[65]

대회연도우승 횟수
전일본 프로 쇼기 토너먼트1983-85, 1987, 1994, 1996, 19997
JT 쇼기 일본 시리즈1989-90, 1992, 1996-97, 20096
올스타 승자 토너먼트1982, 1984, 19863
천왕전1989, 19912
은하전20021
NHK배19851
명기전19791
약사자전19781



참고: 표의 일부 대회는 더 이상 개최되지 않는다.


  •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제2회(1983년도), 1984, 1985, 1987, 1994※, 1996※, 1999※년도 우승. (※표시는 결승 5번 승부의 결착이 다음 해로 미뤄진 경우)
  • NHK배: 제35회(1985년도) 우승.
  • 은하전: 제10회(2002년) 우승.
  • JT 쇼기 일본 시리즈: 제10회(1989년도), 1990, 1992, 1996, 1997, 2009년도 우승.
  • 천왕전: 제5회(1989년도), 1991년도 우승.
  • 올스타 승리 쟁탈전: 제5회(1982년도, 6연승), 제7회(1984년도, 5연승), 제9회(1986년도, 12연승) 우승. (5승 이상 기준)
  • 명기전: 제6회(1979년도) 우승.
  • 약사자전: 제2회(1978년도) 우승.
  • 우승 횟수 합계: 22회

  • 비공식전 우승
  • 후지쯔배 달인전 5회 (2004 - 2007, 2013년)

  • 우승 경험이 없는 기전

타니가와 코지의 프로 데뷔 (1976년 12월 20일) 이후 존재했던 기전 중, 신인 기사 대상 기전을 제외하면 우승 경험이 없는 기전(타이틀전 포함)은 아래 5개뿐이다 (전신 기전은 동일 기전으로 간주).[112]

  • 명장전 (1987년 종료)
  • 빠른 장기 선수권전 (2002년 종료)
  • 다이와 증권배 넷 장기·최강전 (2007년 창설, 2012년 종료)
  • 예왕전 (2015년 창설)
  • 달인전 다치카와 릿피배 (2023년 창설)

6. 3. 쇼기 대상

타니가와는 쇼기 기사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겨 그의 경력 동안 여러 상과 영예를 받았다. 여기에는 일본 장기 연맹(JSA)이 공식 대국에서의 성적을 기준으로 수여하는 연간 쇼기 대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JSA의 다른 상, 그리고 일본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 기관 등으로부터 받은 상 등이 포함된다.[11][12]

회차기간수상 내역
제6회1978년 4월 – 1979년 3월신인상
제7회1979년 4월 – 1980년 3월기교상
제9회1981년 4월 – 1982년 3월기교상
제10회1982년 4월 – 1983년 3월최우수 공로상
제11회1983년 4월 – 1984년 3월특별상
제13회1985년 4월 – 1986년 3월최우수 기사, 최다 승리, 최다 대국
제14회1986년 4월 – 1987년 3월최다 승리, 최다 대국
제15회1987년 4월 – 1988년 3월최우수 기사
제18회1990년 4월 – 1991년 3월최우수 기사
제19회1991년 4월 – 1992년 3월최우수 기사
제22회1994년 4월 – 1995년 3월특별상
제24회1996년 4월 – 1997년 3월최다 대국
제25회1997년 4월 – 1998년 3월최우수 기사
제26회1998년 4월 – 1999년 3월최다 대국
제27회1999년 4월 – 2000년 3월최다 대국
제30회2002년 4월 – 2003년 3월특별상
제31회2003년 4월 – 2004년 3월마스다 고조상※1
제34회2006년 4월 – 2007년 3월명국상※2



※1: 2003년 12월 19일 제62기 A급 순위전 대 시마 아키라 전에서 둔 54수째 △7칠 은성에 대한 수상.


※2: 2006년 3월 16일 제64기 A급 순위전 플레이오프 대 하부 요시하루 전의 대국 내용에 대한 수상.[113]

6. 4. 기타 표창

타니가와는 쇼기 기사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겨 그의 경력 동안 여러 상과 영예를 받았다. 여기에는 일본 장기 연맹(JSA)이 공식 대국에서의 성적을 기준으로 수여하는 연간 쇼기 대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JSA의 다른 상, 그리고 일본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 기관 등으로부터 받은 상 등이 포함된다.[11][12]

일본 쇼기 연맹 이외의 표창
연도수상 내역비고
1983년9월고베시 문화 특별상
1988년고베시 특별 표창
1989년고베시 시정 공로자 표창
1992년고베시 특별 표창
1997년6월효고현 「명예」상
고베 문화 영예상
2002년고베시 특별 표창
2007년효고현 문화상
2014년11월자수포장[13]장기계 12번째 수상


7. 각주


  • 혈액형은 O형이다.
  • 1971년 도큐 쇼기 축제 초등학생 고학년부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승했으며, 같은 대회 중학생 부문에서는 형인 타니가와 토시아키가 우승했다.
  • 어릴 적부터 쇼기에 몰두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 후지이 맹은 1998년 용왕전 7번 승부에서 타니가와와 대결하기 직전 바둑·쇼기 저널에 출연했다. 당시 프로그램 사회자이자 같은 니시무라 카즈요시 문하의 선배인 야마다 쿠미 여류 기사로부터 "타니가와 용왕은 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게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선물받았다.
  • 음식 중에서는 외에 새우도 싫어한다.[108] 본인에 따르면 어릴 적 초등학생 때 먹고 탈이 난 경험 때문이며, 현재는 먹어도 괜찮지만 만일을 대비해 대국 중에는 피한다고 한다.[109]
  • 2006년 NHK 쇼기 강좌 '타니가와 코지의 본질을 간파한다'의 '쇼기 원 포인트 클리닉' 코너에서 타니가와가 의사 복장을 하고, 어시스턴트인 시마이 사오리 여류 기사가 간호사 복장을 하는 등 코스프레를 한 적이 한 차례 있었다.
  • 명인전에서 카토 히후미, 나카하라 마코토, 하부 요시하루, 사토 야스미츠, 마루야마 타다히사, 모리우치 토시유키가 명인으로 재위할 때 도전자로 대국했다. 타니가와 본인이 명인일 때 도전자였던 요네나가 쿠니오를 포함하면 총 7명의 명인 경험자와 명인전 무대에서 맞붙은 셈이 된다.
  • 2014년 11월 자수포장을 받았다.[110]
  • 2023년도 말(2024년 3월 31일) 기준 통산 성적은 2324 대국 1391승 930패로[111], 현역 기사 중 최다 대국 및 최다 패배 기록이다.[111]

참조

[1] 웹사이트 Kishi Dētabēsu: Tanigawa Kōji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11-03
[2] 간행물 Heisei Nijūrokunenban Shōgi Nenkan Nisenjūyonnen https://books.google[...] MyNabi Publishing/Japan Shogi Association 2018-11-03
[3] 뉴스 Tanigawa Kōji Kudan ga Tsūsan Sensanbyakushō Shijō Goninme https://www.sankei.c[...] 2018-11-03
[4] 웹사이트 Wakashishisen (Senkyūhyakunanajūnananen - Senkyūhyakukyūjūichinen)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4-03
[5] 웹사이트 Meijinsen・Jun'isen: Kako no Kekka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4-03
[6] 뉴스 Tanigawa ga Kōshikisen Sennihyakushō Rekidai Yonninme, Yonjūhassai Sainennshō Kiroku http://www.asahi.com[...] 2018-03-14
[7] 뉴스 Tanigawa Kudan ga Sensanbyakushō Tassei Shijō Goninme https://mainichi.jp/[...] 2018-10-01
[8] 웹사이트 Kishi Dētabēsu: Tanigawa Kōji Shōdan Rireki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3-13
[9] 웹사이트 Kishi Dētabēsu: Tanigawa Kōji Taitoru Rireki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3-13
[10] 웹사이트 Kishi Dētabēsu: Tanigawa Kōji Yūshō Rireki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3-13
[11] 웹사이트 Kishi Dētabēsu: Tanigawa Kōji Shōgi Taishō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3-13
[12] 웹사이트 Kishi Dētabēsu: Tanigawa Kōji Sonota Hyōshō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3-13
[13] 뉴스 Shōgi no Kishi Hakkutsu, Fan to Kōryū Shijuhōshō Nihon Shōgi Renmei Kaichō Tanigawa Kōji http://www.sankei.co[...] 2018-03-13
[14] 웹사이트 Nenkan Kakutoku Shōkin・Taikyokuryō TOP10 https://archive.toda[...] Kishi-mania 2018-03-13
[15] 웹사이트 Nisenrokunen Kakutoku Shōkin・Taikyokuryō Besuto Nijū http://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3-13
[16] 웹사이트 Nisennananen Kakutoku Shōkin・Taikyokuryō Besuto Nijū http://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3-13
[17] 웹사이트 Nisenjūsannen Kakutoku Shōkin・Taikyokuryō Besuto Jū http://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8-03-13
[18] 웹사이트 Nihon Shōgi Renmei Shinyakuin no Oshirase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7-03-13
[19] 웹사이트 Tanigawa Kōji Senmuriji, Shinkaichō ni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7-03-13
[20] 뉴스 Nihon Shogi renmei, Shinkaicho ni Tanigawa Senmuriji wo Senshutsu http://www.asahi.com[...] 2018-03-13
[21] 웹사이트 Nihon Shōgi Renmei Shinyakuin no Oshirase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7-03-13
[22] 웹사이트 Nihon Shōgi Renmei Shinyakuin no Oshirase https://www.shogi.or[...] Japan Shogi Association 2017-03-13
[23] 뉴스 Head of shogi association resigns after top player cleared of cheating http://mainichi.jp/e[...] 2018-03-13
[24] 뉴스 Elite player tapped as new 'shogi' body chief after defamation scandal https://www.japantim[...] 2018-03-14
[25] 서적 Famikon Konpurito Gaido https://books.google[...] Shufunotomo Co. 2019-09-17
[26]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が永世名人(十七世名人)を襲位 https://web.archive.[...] 日本将棋連盟 2022-05-26
[27] 웹사이트 新棋士会発足について https://www.shogi.or[...]
[28] 웹사이트 「棋士会」役員変更のお知らせ https://www.shogi.or[...]
[29] 뉴스 将棋の藤井聡太六冠 名人戦制す 史上最年少 名人獲得 七冠達成 https://www3.nhk.or.[...] NHKニュース 2023-06-01
[30] 문서 藤井聡太は2016年10月1日付で四段昇格しており、6年243日後に名人となっている。
[31] 웹사이트 光より速く(第2回柏将棋フェスティバル) http://tanigawa17.li[...]
[32] 뉴스 日本経済新聞 1997年10月14日夕刊 https://archive.vn/C[...] 日本経済新聞
[33] 서적 名人谷川浩司 池田書店
[34] 웹사이트 ホリデーインタビュー “負けず嫌い”を貫く〜プロ棋士・谷川浩司〜 https://archive.vn/A[...] goo
[35] 문서 ただし、『常識外の一手』『藤井聡太論 将棋の未来』などに拠ると、「谷川をつぶす会が」出来たり、8連敗を喫した苦手がいたこともあって、三級から二級に昇級するのに11ヶ月を要した。
[36] 문서
[37] 웹사이트 리코우将棋部員 프로필 http://www.ricoh.com[...]
[38] 웹사이트 다니가와 토시아키씨 인터뷰 https://book.mynavi.[...] 마이너비 将棋 정보국 2016-05-16
[39] 간행물 週刊将棋 1988-12-28
[40] 문서
[41] 서적 将棋王手飛車読本 별책 보물섬
[42] 문서
[43] 문서
[44] 서적 第四十二期将棋名人戦全記録 마이니치 신문사
[45] 서적 요네나가 쿠니오의 책 일본 将棋 연맹
[46] 문서
[47] 간행물 将棋世界 일본 将棋 연맹 2000-01
[48] 문서
[49] 문서
[50] 간행물 将棋マガジン 일본 将棋 연맹 1996-03
[51] 서적 다니가와 vs 하부세 100번 승부-최고봉의 격투 보! 일본 将棋 연맹 2000
[52] 간행물 将棋マガジン 일본 将棋 연맹 1996-04
[53] 웹사이트 「7칠의 지점이 빛나 보였다」다니가와 고우지 9단이 말하는, 2100국 이상의 공식전 사상 최고의 한 수란?|将棋 칼럼|일본 将棋 연맹 https://www.shogi.or[...] 2019-04-12
[54] 문서
[55] 문서
[56] 문서
[57] 문서
[58] 문서
[59] 문서
[60] 문서
[61] 문서
[62] 문서
[63] 문서
[64] 방송 바둑・장기 저널 2009-11-28
[65] 웹사이트 다니가와 고우지 JT 패자가 도쿄도・오사카시에 반고마 기증|将棋 뉴스|일본 将棋 연맹 https://www.shogi.or[...]
[66] 문서
[67] 웹사이트 다니가와 고우지 9단이 1200승을 달성!|将棋 뉴스|일본 将棋 연맹 https://www.shogi.or[...]
[68] 문서
[69] 웹사이트 다니가와 고우지 9단, A급 몰락…연속 재적 32기 http://www.yomiuri.c[...] 요미우리 신문사 2014-01-11
[70] 웹사이트 다니가와 9단 첫 A급 몰락 십칠세 명인, 将棋 연맹 회장 http://sankei.jp.msn[...] 산케이 신문사 2014-01-11
[71]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通算1300勝を達成! https://www.shogi.or[...] 日本将棋連盟 2018-11-21
[72]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通算1309勝で単独4位 将棋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19-02-15
[73]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が歴代単独3位の1325勝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22-06-10
[74]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B級2組へ降級「気持ち入れ替えてまたやりたい」名人戦順位戦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 Sponichi Annex 芸能 2022-06-10
[75] 웹사이트 将棋“光速の寄せ” 谷川浩司九段が「永世名人」の称号獲得 https://www3.nhk.or.[...] NHK 2022-06-10
[76] 서적 日本将棋用語事典
[77] 문서 第35回将棋の日 次の一手名人戦の解説において
[78] 웹사이트 NIKKEI NET 将棋王国 http://hobby.nikkei.[...]
[79] 간행물 将棋世界1972年6月号
[80] 웹사이트 コラムの森 (10)驚異の世代を倒せ・年齢重ね円熟味 http://hobby.nikkei.[...] 2022-06-10
[81] 서적 集中力 角川書店
[82] 웹사이트 「渡辺明五段に聞く 3年目で開眼、「プロらしい将棋」に」 http://hobby.nikkei.[...] NIKKEI NET 将棋王国 2022-06-10
[83] 웹사이트 Suma Cafe ~すまカフェ(vol.22) https://web.archive.[...] 神戸市須磨区
[84] 뉴스 中外日報 平成7年1月21日付 中外日報 1995-01-21
[85] 웹사이트 光速ノート 147 http://tanigawa17.li[...] 2008-10-03
[86] 웹사이트 定期刊行物:大乗(本願寺出版社) https://web.archive.[...]
[87] 간행물 5年目岡田野球の変貌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8-06-30
[88] 웹사이트 阪神・今岡選手に二段免状贈呈! http://www.kansai-sh[...] 2022-06-10
[89] 웹사이트 ヤクルト古田捕手に参段免状贈呈 http://hobby.nikkei.[...] 2022-06-10
[90] 서적 心を読み、かけひきに勝つ思考法 PHP研究所
[90] 서적 「勝負脳」を鍛える PHP研究所
[91] 웹사이트 平成9年フォトニュース https://www.city.kob[...] 神戸市 2022-06-10
[92] 웹사이트 「 誉」賞受賞者一覧 http://web.pref.hyog[...] 神戸市 2022-06-10
[93] 웹사이트 神戸大使:谷川 浩司 氏 https://www.city.kob[...] 神戸市 2022-06-10
[94]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が「兵庫県文化賞」を受賞|将棋ニュース|日本将棋連盟 https://www.shogi.or[...] 日本将棋連盟 2022-06-10
[95] 웹사이트 日本将棋連盟新役員のお知らせ|将棋ニュース|日本将棋連盟 https://www.shogi.or[...]
[96] 뉴스 日本将棋連盟、新会長に谷川専務理事を選出 https://web.archive.[...] 朝日新聞 2012-12-25
[97] 웹사이트 谷川浩司専務理事、新会長に|将棋ニュース|日本将棋連盟 https://www.shogi.or[...]
[98] 웹사이트 日本将棋連盟新役員のお知らせ|将棋ニュース|日本将棋連盟 https://www.shogi.or[...]
[99] 웹사이트 日本将棋連盟新役員のお知らせ|将棋ニュース|日本将棋連盟 https://www.shogi.or[...]
[100] 문서 シンクロ(所在地:東京都品川区、代表取締役社長:西井敏恭)
[101] 뉴스 将棋ニュース 2016-07-19
[102] 웹사이트 第29期竜王戦七番勝負挑戦者の変更について https://www.shogi.or[...] 日本将棋連盟 2016-10-12
[103] 뉴스 ソフト使用疑惑「不正の証拠ない」 第三者委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6-12-26
[104] 뉴스 第三者委員会調査結果を受けて 日本将棋連盟 2016-12-27
[105] 뉴스 離席発言「真偽の調査を怠った」 将棋連盟の説明詳細 朝日新聞DIGITAL 2016-12-28
[106] 웹사이트 会長の辞任に関するお知らせ https://www.shogi.or[...] 日本将棋連盟 2017-01-18
[107] 웹사이트 「どうしても言いたいことがある」 三浦九段が初めて語った騒動の内幕 https://ironna.jp/ar[...] 産経デジタル 2019-07-12
[108] 블로그 棋士、それぞれの海外旅行 https://shogipenclub[...] 2013-01-17
[109] 웹사이트 第32回近鉄将棋まつり https://archive.ph/4[...]
[110]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が紫綬褒章を受章|将棋ニュース https://www.shogi.or[...] 2014-11-04
[111] 웹사이트 通算成績|成績・ランキング|日本将棋連盟 https://www.shogi.or[...] 2024-04-01
[112] 문서 朝日杯将棋オープン戦、朝日オープン将棋選手権、竜王戦、十段戦に関する記述
[113] 웹사이트 第34回将棋大賞決まる!|将棋ニュース|日本将棋連盟 https://www.shogi.or[...]
[114] 웹사이트 名人戦・順位戦 https://www.shogi.or[...]
[115] 웹사이트 竜王戦 https://www.shogi.or[...]
[116] 웹사이트 第27回「将棋の日」感謝状・表彰状贈呈者(日本将棋連盟からのお知らせ) http://www.shogi.or.[...]
[117] 웹사이트 第42回「将棋の日」表彰・感謝の式典の模様|将棋ニュース https://www.shogi.or[...] 2016-11-17
[118] 서적 近代将棋 1992年3月号「プロ棋界最前線(武者野勝巳)」 https://dl.ndl.go.jp[...] 近代将棋社
[119] 서적 将棋世界 1997年5月号 https://dl.ndl.go.jp[...]
[120] 웹사이트 記録室 http://www.shogi.or.[...]
[121]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通算1100勝達成! https://www.igoshogi[...] 2006-02-07
[122]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が1200勝を達成!|将棋ニュース https://www.shogi.or[...] 2011-03-11
[123]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通算1300勝を達成!|将棋ニュース https://www.shogi.or[...] 2018-10-01
[124] 웹사이트 谷川浩司九段、通算1325勝で単独3位に|将棋ニュース https://www.shogi.or[...] 2019-09-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